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ISSUE

ISSUE

게시판 상세
코시체, 토카이 와인의 영주 땅을 찾다.

코시체, 토카이 와인의 영주 땅을 찾다.




지난 2013년 10월 17일~31일 기간, 중앙 유럽 5개 나라의 와인을 취재키 위해 여행을 떠난 바 있다. 마침 전통의 유럽 와인 발간을 준비하고 있는 참이어서 매우 인상 깊게 슬로바키아의 수도, 그리고 이에서 500여 ㎞ 떨어진 코시체를 찾아보았다. 이번 호는 코시체(Kosice)를 중심으로 역사와 와인의 이야기를 다듬는다.

 

글 최훈 본지 발행인 사진 장영수, Wikipedia





슬로바키아의 역사

 

슬로바키아는 중앙 유럽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이 나라의 주된 종족은 슬로바키아인. 오늘날의 이 땅으로 이주해 온 것이 5~6세기. 이후 AD 1000년에 마자르 족이 이 땅에 들어와 헝가리 왕국(Kingdom of Hungary, 1000~1919)을 세우면서 슬로바키아의 역사는 곧장 헝가리 역사와 궤를 같이 하게 된다. 슬로바키아의 땅이 바로 헝가리 왕국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기에 그러하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 무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이 해체되고 유럽의 새 질서가 다듬어지면서 헝가리에 속해 있던 슬라브족 마을을 떼어내 새로 설립 되는 체코슬로바키아(1918~1939)에 넣었다. 이후 1991년 소련 연방이 붕괴되면서 느슨한 여건을 틈타 슬로바키아는 독자적인 독립 국가를 설립하고자 다시 체코에서 분리된다. 바로 슬로바키아의 탄생이다. 1993년의 일이다. 

 

이런 역사적 흐름을 본다면 슬로바키아 땅에서 일어난 일은 곧바로 헝가리 역사의 한 가닥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슬로바키아의 수도는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국토의 최 서남단 다뉴브 강가에 자리한 지극히 유서 깊은 역사적 도시이다. 제 2의 도시는 코시체(Kosice), 이 나라 제일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난 날 헝가리 왕국의 한 영지의 중심도시이기도 했다. 


브라티슬라바를 찾다

 

이번 여행은 중앙 유럽 여러 나라들의 와인 실체를 확인하고자 나선 여정이다. 서울을 나선 항공기가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들어가 이곳에서 며칠 머물면서 도나우 강가(다뉴브 강)의 오스트리아 와인을 체험했다. 주어진 일정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인 슬로바키아로 향했다. 목적지는 이 나라의 수도 브라티슬라바, 마침 서울에서 출발할 때 주 한국 슬로바키아 대사 Mr Dusan Bella의 조언에 따라 비엔나에서 도나우 강 물길로 수도 브라티슬라바를 찾았다.

 

가을이 한창 익어가는 10월 중순, 비엔나에서 브라티슬라바로 떠나는 여객선에 올랐다. 화창한 날씨여서 더 한층 들뜬 기분으로 뱃길에 나섰다. 이곳 비엔나에서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 까지는 약 60km 떨어져있는 근거리. 세계 어느 곳에서도 두 나라의 수도가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다뉴브(도나우) 강의 드넓은 강폭을 헤치면서 보트는 약 1시간 반의 뱃길 끝에 종착 터미널에 이르고 있었다. 선상으로 나가 보았다. 거대한 현수교가 강 양쪽을 가로질러 놓여있고 특이한 북유럽의 건축 양식을 한 브라티슬라바의 모습이 정감 있어 보였다. 강 옆은 울창한 숲들이 한창 가을을 즐기고 있다. 마침내 미지의 이국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역사의 땅

 

브라티슬라바는 짙은 역사의 훈향을 지니고 있다. BC 100년 경, 아득한 옛날 이 곳에 처음 정착한 백성은 켈트 족, 그 다음이 로마인이 이 고을을 이루어냈다(AD 300~400). 그러나 13세기 타타르(몽고족)족의 침입으로 고을은 폐허가 되었고 1526년부터 오토만 제국의 잦은 침입으로 국토의 많은 부분이 그들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1536년 브라티슬라바(당시 프레스부르크)는 1783년까지 무려 250여 년간 헝가리 왕국의 수도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연유로 브라티슬라바는 북유럽의 여러 고을 가운데 가장 번성한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공국, 국가 등 많은 군왕과 여왕들이 이 도시에 찾아와 가장 위엄에 찬 대관식을 치루기도 했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이 18세기 유럽의 국제 질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마리아 테레사(Maria Teressa, 1717~1780)이다. 알려진 바로는 브라티슬라바에서 군왕, 여왕 등의 대관식이 있은 것이 모두 19차례라 하니 가히 이 도시의 깊은 역사적 흔적을 짐작케 해준다. 1993년, 새로 탄생한 슬로바키아의 수도로 자리 잡으면서 브라티슬라바는 다시 번성의 터전을 마련했고 유럽의 중심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유서 깊은 이 도시의 여러 곳을 관람한 후 호텔 Arcadia에서 여장을 풀었다. 5성급 호텔로서 아주 훌륭한 전통적 호텔이다. 일찍 쉬었다. 내일 아침에 500여 ㎞ 떨어진 코시체로 긴 여정을 떠나야 한다.



코시체를 찾는 여정

 

브라티슬라바에서 코시체를 찾는 여정을 굳이 자동차로 잡은 이유는 이 나라 국토에 산제하고 있는 와인 산지를 함께 둘러보고픈 바람 때문이었다. 이 나라는 모두 6개의 권역 와인 산지를 갖고 있다. 이 가운데 남 슬로바키아 산지(South Slovakia, Jusnoslovenska, 5,345ha)를 비롯해 중앙 슬로바키아 산지(Central Slovakia, Stredoslovenska, 2,502ha), 동 슬로바키아 산지(Eastern Slovakia, Vyehodoslovenska, 1,071ha) 그리고 토카이 산지(Tokaj, 908ha)등이 모두가 부분적으로 코시체에 이르는 도로 주변에 자리하고 있어 그러했다. 

다뉴브 강을 등지고 동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다가 일러주는 와인 산지에 잠시 머물렀으나 이미 가을철, 포도 수확이 끝난 포도밭은 그저 스산한 모습일 따름이었다.

장장 5시간의 여정을 끝내고 마침내 코시체에 들어섰다. 이 도시의 첫 인상은 이방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도시 전체는 숲이 내려앉아 있고 동부 유럽의 조금은 투박스런 내음이 풍겨졌다. 이미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어 마음먹고 있던 라코츠의 무덤이 있는 엘리자베스 대 성당을 서둘러 찾았다. 외벽이 검은 벽돌로 덮여있는 대성당은 높다랗게 허공을 향해 있었다. 성당 안에는 프란치코 라코츠의 지하 무덤과 그의 일대기가 그려진 웅장한 벽화가 장식되어 있다. 바로 토카이 와인의 영주였으며 헝가리 독립 항쟁을 이끌었던 영웅의 흔적어 머물고 있는 곳이다.



라코츠의 유적들

 

코시체에는 이름난 헝가리의 독립 영웅인 라코츠(Francis  Rakoczi, 1676~1735)의 무덤이 있다. 이와 더불어 그가 오스만 터키의 영토이던 테키르다그(Tekirdag)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했던 그곳의 거처(숙소)를 그대로 옮겨 이곳 코시체에 마련해두고 있다. 사실 라코츠는 헝가리 왕국의 여러 영지 중 트란실바니아 영지의 영주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이 나라 보르샤(Borsa) 지방이다.

 

1703년 라코츠는 처음으로 그의 영지 전 재산을 끌어 모아 날로 더해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병합을 반대하는 항쟁을 벌였다. 마치 호랑이를 몰아낸 자리에 여우가 들어 주인 노릇하듯 오스만이 물러난 자리에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의 새 주인 노릇을 하려했다. 영지의 농민과 병사들로 오스트리아 저항군을 만들어 8년간을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성공치 못하고 조국을 등진 망명길에 올랐다. 처음은 폴란드, 이어서 프랑스에 머물렀다.

 

프랑스 망명 때 지난 날 헝가리를 침략했던 오토만 제국의 아흐메드 3세의 초청이 있어 터키의 이스탄불 근처 테키르다그(Tekirdag)에서 18년간 망명 생활을 한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이스탄불에서 옮겨져와 이곳 코시체의 엘리자베스 대성당에 그의 어머니와 함께 묻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성당에는 그의 전 생애를 그림으로 나타내는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어릴 때의 성장과 청장년 시절의 모습, 망토를 늘어뜨리고 말 위에 높이 앉아 전장에서 포효하는 자태, 망명길에 올라 오스만 제국의 술탄(왕) 아흐메드 3세의 영접을 받는 장면, 마지막 생애의 정리를 위해 자신이 침통하게 구술하고 젊은이(Kelemen Mikes, 라코치의 숭배자)가 이를 받아 적는 장면 등이 있다. 영웅의 일생이 그대로 재현된 듯 해 가슴이 뭉클하다. 이 대성당은 곧장 라코츠한테 헌증된 사원과 같았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영웅 광장에는 그가 이 나라의 여러 영웅들과 함께 청동 동상의 모습으로 저 멀리 두나강(다뉴브강)을 응시하고 있다. 

 

코시체 인근에 라코츠가 생장하고 대 오스트리아 항쟁을 도모 했던 그의 영지 안에 생가가 있는 보르샤(Borsa) 마을이 있다. 지난날 영화가 넘쳤던 영지의 주인 아들로서 그가 생활했던 흔적이 넓은 집안에 곳곳 널려있다. 한 가지 특기할 일은 헝가리의 독립 영웅이 지금은 슬로바키아의 코시체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합병해 이른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설립한 것이 1867년, 해체된 것이 1918년이다. 약 50 여 년간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병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가 실질적으로 헝가리에 대해 지배적 야욕을 보인 것은 훨씬 그 이전이다. 1699년 카르로비치 조약의 체결로 오스만 제국이 더 이상 헝가리 제국을 약탈치 못하게 되자 오스트리아가 대신 허약한 헝가리에 대해 지배의 야욕을 뻗힌 것이다. 라코츠가 자신의 전 재산을 털고서 오스트리아와 항쟁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슬로바키아의 토카이 와인

 

코시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슬로바키아 토카이 와인이 나는 말라 트리나(Mala Trina) 마을이 있다. 예약된 마치크 와이너리(Macik)에 들렸더니 한 참 포도밭 수확이 바빠 모두가 정신없어 보였다. 다행히 영어가 유창한 이집 딸 Michela가 영접해주어 어려움은 없었다. 

 

와이너리를 둘러보았다. 마치 미로와 같은 화산토의 응회암을 파고들어 만들어져 있다. 습한 그리고 어둑한 숙성고는 세월의 연륜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벽면에는 곰팡이 덮개가 두껍게 깔려있다. 토카이 와인의 숙성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건이라 했다. 한 길 굴이 다시 샛길로 파고들어 있어 정말 어디가 어딘지 모를 듯 했다. 전기 대신 통로 중간 중간에 촛불을 켜두고 있다. 와인은 이런 동굴 속에서 깊은 잠을 자면서 숙성의 절정을 이룬다고 했다. 

 

고마운 인사와 작별을 나누고 다음 행선지인 헝가리의 토카이 마을로 길을 잡았다. 그리 멀지 않는 곳에 그 유명한 헝가리의 토카이 와인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날은 한 지역이었던 것이 1920년 1차 세계 대전 후의 유럽 질서를 다듬으면서 트리아농 조약(Treaty of Treanon)에 의해 원래 하나이던 헝가리의 토카이 마을이 한쪽이 잘려 슬로바키아 땅이 되면서 새 국경이 그어진 것이다.

 

어제 저녁 라코츠의 무덤이 있는 엘리자베스 대성당에 헝가리인 몇 사람이 성당 입구에서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 모습, 그리고 오늘 다시 헝가리의 토카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새로 그어진 국경의 아이러니를 실감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토카이 와인의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선 듯 했다.




비밀번호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댓글 수정

비밀번호 :

/ byte

비밀번호 : 확인 취소

댓글 입력
댓글달기 이름 : 비밀번호 : 관리자답변보기

영문 대소문자/숫자/특수문자 중 2가지 이상 조합, 10자~16자

/ byte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

회원에게만 댓글 작성 권한이 있습니다.